여기는 산청과 함양 사이 어느 절이다. 뻐꾸기와 여러 이름 모를 새가 울고 선명한 햇빛이 초록이 진한 둥근 잎 위에서 노닌다. 둥근 산새를 가진 지리산이 코앞이다.

새벽이면 108배를 올리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공양(식사)한다. 상 위는 땅에서 난 것들이 전부지만 서울에서 먹던 음식보다 훨씬 맛있다. 실은, 상차림이 낯익다. 원주 고향집 상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생각난 김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내에서는 전화기도 잘 안 터지는 첩첩산중이라 잠시 밖에 나갔다 왔다. 이 절에 오랫동안 기도를 올리고 있는 친구가 오늘은 지리산 둘레기를 걷자 했지만, 혼자 쉬기로 했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말자"고 얄개들이 부른 '청춘만만세'가 발을 묶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말이 생각나서 어젯밤 남자친구와 통화하며 이런 얘길 했더니 "그거 노래 가산데.. W의 '카우걸을 위한 자장가는 없다'가 제목일거야" 검색해보니 "도망쳐 간 그것에 낙원은 없는거야" 정확한 가사였다. 어둠 밖에 남지 않은 쌀쌀한 산 속의 절에서 서울 어딘가에서 샌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시 서울로, 도시로 달음박질 치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장소의 변화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알았다. 여행은 도피가 아니다. 현실 안에 여행이 있다.

연속적인 것은 고민 뿐이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내내 고민한다. 실은 이렇게 살고 싶었더라고, 하지만 이내 다시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을 바꿔가며 갈피를 못 잡는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모두 무탈하게 이 땅 이 시대 이 공기에서 함께 숨쉬었으면 한다. 어제 날씨 얘기를 하다 내일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얘기하다 다시 안녕을 기약하는 삶을 누리고 싶다. 내가 무엇이 되서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무탈했으면 한다. 무엇이 되어 어떤 일을 하는 것 보다 내 주변 사람들와 오손도손 잘 지내며,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싶다.

내 마음이, 내 생각이 늘 정리가 되어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나쁜 것에 흔들리지 않고 헛된 욕망과 탐욕에서 멀어져, 주체적이고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자발적이고 스스로 제어가 잘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적극적이나 다른 이에 마음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행동하고 싶다. 바른 말과 고운 말을 쓰고 싶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현실에서의 내 위치를 찾을 수 있을까?

써내려갔지만, 혼란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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